2004년 3월 1일 멜번에서 기차를 4~5시간쯤 타고 밀두라 라는 곳에 갔다.
포도를 따는 농장으로 시즌이 거의 끝나갈 때라고는 했지만 아직 할 일이 남았다고 해서 H를 따라 밀두라 농장에 들어왔다.
오랜 멜번생활과 공장일에서 벗어나서 조용한 시골마을의 넓은 자연으로 빠져나오니 새로 호주생활을 시작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농장생활은 아주 단순했다.
오전 5시 30분에 일어나서 간단히 아침을 먹고 점심 도시락을 싸고 6시30분에 단체로 봉고차를 타고 농장으로 출발한다. 7시 30분부터 포도를 따기 시작해서 12시나 2시면 끝이 난다. 가끔은 5시 30분에 출발을 해서 12시에 포도 따기가 끝나고 2시간 정도 공장 같은 곳으로 가서 포도를 포장하는 일을 한다.
포장하는 일은 시간당 10$정도를 받지만 포도 따는 일은 Box당 1.8$로 계산을 한다. 각 Box를 저울위에 올려놓고 30Kg이 넘어야 한 Box가 끝난 것이다. 차곡차곡 좋은 포도들로만 잘 쌓아야 한다. 가끔 나쁜 포도를 너무 많이 넣으면 농장 주인이 확인을 하고 Box 개수를 줄여버린다. 각 Box에 자기만의 번호표를 붙이기 때문에 누가 딴 것인지 다 알 수가 있다.
처음에 일을 시작했을 때 나는 22Box밖에 채우지 못했다. H는 보통 4~50Box를 땄고 농장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보통 35Box는 채운다. 일에 완전히 능숙한 이민자들은 7~80Box를 따기도 한다.
종일 파리와 뜨거운 태양과 싸우면서 40$을 벌었고 그것에서 하루 숙박료와 교통비를 6%정도 떼기 때문에 23$정도밖에 못 번 것이다. 너무 속상해 했더니 처음 와서 22Box는 잘 딴 것이라고 한다. 어떤 친구는 겨우 15Box를 땄었다고 했다.
조금은 안심이 되었고 다음날은 다행이도 38Box를 땄다. 일은 조금씩 익숙해져서 45Box를 따는 날도 있었다.
그러나 멜번의 공장에서 일하는 것 보다는 엄청 적은 돈이었다. 실질적으로 나는 돈을 벌러 온 것이 아니라 농장경험을 하러 놀러 온 샘이었다.
밀두라는 정말 더웠다. 찌는 듯 한 더위 속에서 아스팔트를 달리다 보면 신기루처럼 도로 끝은 항상 젖어있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곳까지 가보면 아스팔트가 이글이글 타고 있을 뿐이다.
이런 태양 아래서 끝도 보이지 않을 만큼 길게 뻗은 포도나무들과 몇 시간쯤 씨름 하다보면 머리가 ‘띵’하고 어지럽다. 몸의 땀도 햇빛에 증발되어 버리는 것 같다. 아침, 점심 이라고 해야 숙소에서 급하게 만든 토스트뿐이니 잘 먹지도 못할 뿐더러 아침에 싸온 차가운 물도 2시간 쯤 지나면 따뜻한 물이 되어있었다. 게다가 화장실도 제대로 갈수가 없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가장 견디기 힘든 건 달콤한 포도향에 이끌려 온 파리 떼 들이다.
이 파리 떼에 비하면 다른 일은 아무것도 아니다. 도대체 내 얼굴에 무슨 먹을 것이 있다고 그렇게 달려드는지...
마치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듯이 아무리 쫓아내도 얼굴과 귀에 그리고 안경위에 끝없이 올라타서 싸움을 걸어온다.
파리들은 나의 농장생활을 오래 견디지 못하게 한 가장 큰 주범이다.
일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와 차가운 물로 샤워를 끝낸 3~4시경이면 완전히 자유시간이다.
그놈의 돈이 뭔지 정해진 시간에 한 박스라도 더 채우기 위해 파리와 싸우며 쉬지도 않고 일을 한 자신들에게 풍무한 음식을 제공하며 상을 내린다. 아침, 점심을 부실하게 먹은 탓도 있으므로 다들 저녁만큼은 오랜 시간과 공을 들여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 삼계탕도 수 없이 끓여먹었고, 그늘진 마당의 탁자에서 스테이크 고기도 와인과 함께 먹으며 한가로운 분위기를 흠뻑 누리곤 했다.
가끔은 동네를 산책하기도 하고 강가에 나가 바람을 쐬기도 했다. 주말엔 쇼핑거리로 나가서 구경을 하기도 하고 1~2$ 하는 중고 동화책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그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잠을 좀 더 자거나 영어책을 조금 들여다 보거나 하는 것이 전부였다.
문득 말 그대로 하루 벌어서 하루 사는 일용 노동자의 삶을 살고 있는 나를 발견 했다. 그리고 하루하루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일의 시작과 함께 몇 달 몇 년을 보내는 일용 노동자들의 삶을 조금이나마 체험 할 수 있었다.
여기서 몇 년을 일하고 있는 베트남사람이나 말레이시아 사람들이 조금은 애처롭게 느껴졌고, 또한 여기서 한 두 달이 넘게 일을 하는 다른 한국 친구들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아마도 나보다 훨씬 더 참을성이 많은 친구들일 것이리라.
어쩌면 내가 멜번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면 나도 그렇게 참고 지냈을 지도 모른다. 같은 시간에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공장에 맛들인 나는 이곳에 더 오래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젊은 날의 소중한 경험을 했다고 생각한다. 언제 다시 이런 농장에서 파리와 싸우며 일해보겠는가... 그리고 H와도 멜번에서 지낼때보다 많은 이야기를 하며 더 많은 친구의 우정을 쌓을 수 있었다.
소중한 친구와 끝없이 펼쳐진 포도농장과 밀두라의 따뜻한 시골마을의 경치를 뒤로하고, 농장에 온 지 2주 만에 파리떼와의 전쟁과 뜨거운 태양아래서 도망치듯이 밀두라를 떠났다.
그리고 결국 번 돈은 밀두라 왕복 기차표와 그동안의 생활비를 낼 수 있을 만큼의 금액이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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